Ì 답: 한 율법사가 예수께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분께서 이 말씀을 구약 성경에서 인용하셨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신명기와 레위기에 주어진 율법의 요약을 인용하셨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예수께서는 어떤 새로운 것을 소개한 것이 아니다! 율법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것은 “사랑하라.”이고,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십계명은 단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요약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마태복음 22:40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선언하시며 그 논의를 종결하신 이유이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지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롬 13:10). 율법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나타낸다. 사랑은 어떤 막연하고 감상적인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응답이다. 사랑은 십계명에 나타난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들을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순종으로 인도한다. 결코 불순종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가르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Ì 답: ‘몽학 선생’이란 노예의 신분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돕는 일종의 가정교사였다. 몽학 선생은 그 주인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초등 학문을 가르쳤으며 학교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몽학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몽학 선생(율법)의 존재나 그 기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몽학 선생을 의지하여 그 아래서 구원을 받으려는 인간의 시도가 필요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몽학 선생의 할 일은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가기까지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요, 목적이다. 오늘 한순간 내 이웃을 미워하는 감정을 가졌다면 살인한 것이다. “죄는 불법”이므로 십계명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죄를 지은 것이다. 죄인에게 누가 필요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우침을 줄 뿐이지 우리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율법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율법의 직분은 죽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7:13).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방황하다가 그 반대의 극단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을 가득 가진 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안되자,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정반대의 극단적 가르침을 붙잡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무조건 예수님만 믿자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의 종말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Ì 답: 이러한 질문은 2천 년 전에 예수께서도 받았던 질문이다.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 7:46-48).
성전의 하속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관심과 감동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 “속지 말라. 너희의 종교 지도자들을 쳐다보라. 만일 예수가 진짜 메시아라면 너희 지도자들이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알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했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와 교훈을 거절하였고 결국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 당시에 세 부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첫째, 무지해서 알지 못했던 자들이 있었다. 이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의식적으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그분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를 못했다(약 4:17; 행 17:30). 둘째,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이 부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으나 그를 따르는 데 요구되는 변화를 싫어했다. 예수께서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이기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요 9:41). 요한은,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정직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 부류는 뒤에서 몰래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대해서 호의를 갖도록 영향을 끼쳤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이 그룹에 속했다. 이 그룹에 속했던 많은 사람들이 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담대히 일어섰다.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오순절 날 성령의 부어 주심이 있은 후 사도행전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오늘날에도 세 부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다. 무지해서 모르는 사람, 고의적으로 눈을 감는 사람, 정직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다. 정직하게 진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 하나님의 신의 감화 아래 그들은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반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서 “너희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잘 따랐느냐?”라고 묻는 대신에,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고 하시며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진리에 대하여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확신시켜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것은 당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나타내실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Ì 답: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성경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사람이 성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이 맞지만 그 뜻이 성경을 폐지하자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 말은 안식일의 존폐 문제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의미에 관한 언급이다.
안식일의 원래 목적은 인간에게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고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교제하자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쉼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사사로운 말, 세속적인 일과 학문을 접어 두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임하시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이므로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의 모든 필요는 내가 다 줄 것이다. 내게 와서 받아라." 이 안식일은 우리에게 쉼을 주고 그분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 속에는 완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담겨 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왔다.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내가 너를 고쳐줄 것이다. 너희의 필요를 내가 다 줄 것이다." 안식일을 통해서 피조물이 예수님과 만나는 거룩한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우리에게 재창조 회복이 일어난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출 20:11),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말씀을 믿는 신앙이다. 그분의 말씀 안에 그분의 일이 전부 들어 있고 창조의 능력이 들어 있으며, 그분의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다. 이 신앙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자기 일을 쉬며 순종하므로 걱정과 불안, 초조가 없고 완전한 쉼이 있다.
Ì 답: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아무 날이나 하루를 쉬라”고 되어 있지 않고 “엿새 동안은 네 모든 일을 힘써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1)고 되어 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즉 엿새 동안 일하고 아무 날이나 하루를 쉬는 일주일 제도 사이클에 복을 준 것이 아니고, 일주일의 사이클을 지키면서도 제 칠 일 안식일, 그날에 복을 주셨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에덴동산에서 다른 모든 실과는 따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는 따먹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것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그 결과는 죽음인 것이다. 안식일 계명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다른 엿새는 인간의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일곱째 날인 안식일은 쉼과 예배의 날이다.
이것은 마치 일곱 개의 컵 중에서 다 물이 담겨 있는데 마지막 일곱 번째 컵에 주스가 담겨 있다면 주스를 마시기 위해서는 정확히 일곱 번째 컵을 마셔야만 된다는 사실과도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8월 15일 광복절에 광복을 기념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국기를 달아야 한다. 그런데 그날은 바쁜 일이 있다고 “그까짓 하루 차인데 뭐, 정성만 있으면 되지!”라고 말하면서 8월 16일에 태극기를 단다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비웃을 것이다. 그것처럼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창 2:1-3)이다. 기념일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날에 행해져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까짓 하루 차이인데 뭐, 일요일에 정성스럽게 예배를 보면 되겠지!” 할 때 정성은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예배를 드린 가인의 예배(창 4:3-5)가 될 것이다. 결국, 안식일 문제는 “인간의 뜻을 높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로 압축된다.
Ì 답: 인간의 노력으로는 단 한 가지의 계명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을 쫓아 행하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롬 8:3,4).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빌 4:13).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내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계명의 표준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요일 5:2-4). 그러므로 안식일이란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날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Ì 답: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문제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율법주의이다. 기독교 신앙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행위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하여 순종하는 것(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구원받은 결과로 순종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하여 광복절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광복절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이다. 광복절에 태극기를 거는 사람을 보고 법에 매달려 사는 율법주의자라고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태극기를 걸지 않고 광복절을 무시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외국인이든지, 혹은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조금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Ì 답: 태초로부터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지켰다. 이러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전 구약 시대를 통해 내려왔다. 그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야기에 뿌리 박혀 있다. 창세기는 하루를 말할 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라고 선언한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 전체에서 창조의 각 하루를 언급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성경에서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확증하고 있다. “저물어 해 질 때에(안식일이 지난 후)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막 1:32)
Ì 답: 하나님께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동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을 성취시키고자 하신다.
둘째, 그분은 안식일이 육체적 휴식의 날이 되도록 고안하셨다(출 20:8-11).
셋째,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우리 상호 간, 특히 가족 간의 교제의 날이 되도록 계획하셨다. 또한 안식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축복의 날이 되어야 한다(마 12:8). 하나님께서는 모든 물건 구입도 안식일이 되기 전에 해야 한다고 선언하셨다(느 13:15-18). 안식일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보다 깊은 기쁨과 보다 큰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한 사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제쳐 놓아야 한다(사 58:13,14).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기쁨으로 교제하는 특별한 시간으로서 매 안식일을 즐거움으로 기다릴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이 안식일에 주님과 함께 예배드리는 경험을 갖도록 기대하며 바라고 계신다.
Ì 답: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세계 각처에서 시간이 다르다. 심지어 한국에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같은 시간에 미국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가 있을 것을 다 아셨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생명처럼 지키는 이스라엘이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신 28:15)할 것을 아셨다. 전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의 시간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될까? 오늘날 우리가 찾기를 원하는 똑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께서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레 23:3,31) 지키면 된다고 명확한 대답을 주셨다. 그러므로 자기가 있는 장소에서의 시간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된다. 아무리 지구가 둥글어 밤과 낮이 육 개월씩인 북극 지방이라도,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라도 안식일이 어느 날인지를 알 수 있고 자기가 있는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 중동 지역의 이스라엘 나라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시작하면, 그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나라들로 가면서 해가 지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에서 해가 지고, 터키에서 해가 지고, 영국에서 해가 지고 이렇게 해서 지구 전체가 일주일에 하루 동안 안식일에 들어가게 된다. 어느 지역에 있든지 여섯째 날(금요일) 저녁에 해가 짐으로써 일곱째 날(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